경상남도 함양의 전설
1.박문수와 과부 며느리 [뜬 소문을 바로잡은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어사가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으로 암행의 길을 떠나는 전날 밤에 그를 전송하려고 온 친척되는 사람이
“경상도 함양땅에 가면 과부된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이진사라는 자가 있는데...”
하는 말을 무심코 했다.
'며느리를 데리고 산다?' 박문수는 이 말이 며느리를 보통으로 데리고 산다는 뜻이 아님을 짐작하고 기억해 두었다.
며칠 후 박문수는 함양땅에 들어섰다.
며느리를 데리고 산다는 이진사의 마을을 찾아서 폐의파립의 과객 모양을 하고 들어갔다.
동구 밖에서
“이 마을에 이진사댁이 어디오?”
하고 물으니 어떤 사람이 괴이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이진사댁이란 무엇 말라빠진거요? 이가의 집은 저 외딴 대나무 숲속이오.”
하는 것이었다.
“왜 이진사라 하면 못씁니까?”
“제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놈이 무슨 진사요?”
역시 이진사와 며느리와 좋지 못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이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드디어 박문수는 이진사네 집까지 도달하였다.
마을은 시골 장터 같았으나 이 집만은 울창한 대나무, 밤나무 숲 속에 싸여 있었다.
집은 본채나 아래채가 상당히 큰 기와집이었다.
박문수가 주인을 찾아 들어가니 이진사는 뜰에서 며느리와 함께 멍석을 펴고 뽕잎을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며느리의 나이는 삼십이 못 된 듯한 아름다운 여자였고 이진사는 육십이 가까워 보이는 중노인으로서 속이야 어떻던지 아담스럽고 청조한 인물이었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노자도 떨어지고 몸도 피로해서 댁에 좀 머물게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하며 박문수가 청을 하자 이진사는 아무런 불편한 기색이 없이 손님을 아래채 사랑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저녁 대접이라든지 모든 것이 매우 친절했다. 더욱이 밤에 사랑에 나와서 상대해 주는 이진사의 행동을 보니 상스러운 티나 탐욕스런 기색이 없는 결백한 장자같았다.
글에도 포부가 깊고 시사에도 식견이 높았다. 그리고
“벼슬도 이루지 못하고 처자와 이별을 한 채 혼자 된 며느리와 살림을 하자니 신세가 오죽 하겠습니까?”
하고 탄식하는 빛이 처참해 보였다.
“뵙건대 퍽 고독하신 듯 한데 동네 사람들과 상종을 하시며 어울려 지내시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진사의 표정은 굳어지면서
“그저 내가 불민하니까 어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집니까?”
할 뿐 자세한 대답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동정이나 더 살펴보리라 생각하고 박문수는 베개에 의지해 있는데 이진사는
“그럼 나는 내 처소로 가겠소이다. 피로하신데 일찍 주무시오.”
하며 이부자리를 펴 주고서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가 어느 방으로 가나하고 박문수가 문틈으로 내다보니 이진사는 윗채에 달린 머릿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바야흐로 이진사와 그의 며느리와의 실제 행동을 정탐할 참이었다. 며느리가 어느 방에 거처하는지 문을 살그머니 열고 이 집의 내부구조를 살피었다.
안마당 저쪽 나무 틈으로 등불이 새어나오는 곳이 안방이며 시아버지가 자는 머릿사랑에서 윗방들과 대청 하나를 건너서 멀직하게 떨어져 있는 그 안방이 며느리의 방임이 분명하였다.
박문수는 다시 문을 반쯤 닫고 그 문틈 옆에 앉아서 뚫어져라 윗채 머리사랑의 동정을 살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첫닭이 꼬끼요하고 울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과연 이진사가 사랑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옳다. 저자가 안방으로 들어가려나보다.’ 박문수는 이진사의 뒤라도 밟아 들어갈 듯이 긴장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이진사는 일단 유건을 쓰고 담뱃대를 든 자태로 안마당으로 내려서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저쪽 들창문 옆으로 옮겨가서 역시 문틈으로 내다 보았다.
이진사는 울창한 뽕나무 사이로 자기집 주위를 한바탕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사방에 인적이 없음을 살피고 나서 안방으로 들어가겠지'
이렇게 추측한 박문수는 이 틈을 타서 재빨리 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서서 안방쪽으로 갔다.
안방은 두 칸이나 되는 큰 방이었다.
박문수는 다시 그 방 앞마루 밑으로 들어가 엎드려서 숨결을 죽이고 엿보고 있었다.
과연 이진사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서 안방 마루 아래 댓돌 위에까지 올라섰다. 그리고는 ‘에헴 에헴’ 하고 가벼운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래도 며느리 방에서는 아무 동정이 없었다.
시아버지는 다시 담뱃대를 가지고 똑! 똑! 마루를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안방 문이 열리며 술상이 마루로 나오는 것이다.
이진사는 술을 두어잔 따라 마시고는 애기는 잘 자고 있느냐,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자기 방으로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자기도 객실로 나왔다.
나와서도 미진해서 방문을 반쯤 열고 윗채 머릿사랑이랑 안방의 동정을 계속 살피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부지런한 모습만이 눈에 띄었다.
시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뽕잎을 따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또 안방과 대청사이를 들락날락하면서 무엇을 하는지 뚝딱거리기도 하고 날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안방에서 누에를 기르는 모양이지?' 하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이튿날 밤, 박문수는 계속해서 이 집에 묵어서 이진사와 며느리의 행동을 살폈으나 여전히 전날 밤과 같을 뿐 아무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밤낮으로 누에를 기르기 위해서 안방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 어두운 새벽에 며느리의 방에 가서 술을 마시는 건 무슨 뜻인고?
박문수는 최후의 실험단계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밤, 박문수는 이진사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장을 하였다.
행장속에 예비했던 유건이랑 긴 담뱃대랑 얼굴에 수염까지 붙였다.
'이만하면 얼른 알아보지 못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한 다음 시아버지는 첫닭이 울고난 후에 일어나니 나는 첫닭이 울기 전에 들어가보리라하고 예정시각을 기다렸다.
드디어 밤이 깊었다. 박문수는 안방 마루앞까지 가서
“얘야! 얘야!”
하며 가벼운 기침을 했다.
그런 다음에 얼마 있다가 담뱃대로 마루바닥을 똑! 똑! 두드렸다.
그리고서는 혹시라도 며느리에게 정면으로 얼굴이 보여질까 겁이 나서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안마당을 향하여 수염을 쓰다듬은 다음 왼손으로 볼과 턱배기 언저리를 가리었다.
그러자 전날 밤과 같이 방문이 열리며 며느리의 술상이 나오는 참이었다.
순간 박문수는 빠르게 손을 뻗쳐서 그 여인의 손목을 꽉 잡았다.
만일 이 때에 무슨 사사로운 마음이 있는 여인이라면 내밀던 술상이 조용히 놓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술상은 왈가닥 마루에 떨어졌다.
동시에 여인은 형용할 수 없는 가느다란 비명을 올리면서 손을 뿌리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망녕이 드실 때도 아닌데 이 일을 어쩌나’
염려하던 여인은 마침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문수는 마음속으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객실로 몰래 나왔다.
그러나 다음에 일어날 풍파야말로 박문수에게는 더욱 좋은 재료가 되었다.
첫닭이 '꼬끼오'하고 울자 이진사가 여전히 하던 행동대로 집안팎을 휘돌아서는 안방 마루 앞으로 올라가더니 에헴! 에헴!하고 기침을 하다가 담뱃대로 마루를 똑! 똑! 두들기는 것이었다.
이 때 엿보고 있던 박문수는 장차 일어날 사태를 예측하고 긴장이 되었다.
시아버지 앞에 술상이 나오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방안에선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허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로구나.’
시아버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얘야 왜 우느냐?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하고 물었지만 며느리는 종시 문을 굳게 닫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이진사는 기운이 하나도 없이 밖으로 나갔으며 날이 새자 박문수와 서로 대하게 되었다.
며느리는 일어나 밥도 짓지 않고 누워서 우는 모양이었다.
이진사는 손님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지 못하게 된 것을 민망해하며 들락날락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박문수를 대했다.
박문수는 뻔히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고는
“혹시 자부께서 병이 나셨나요?”
하고 물었다. 이진사는
“그런 모양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박문수는 며느님이 불편하시게 된 곡절에 대해서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몇 가지 사정 이야기를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첫째, 내가 댁을 찾아오던 길에 동네 사람들의 공론을 들었는데 주인장이 며느님의 방에 깊은 밤중에 드나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법도 한 일이지요. 이미 짐작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 하면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가운이 불행해서 처자식을 모두 잃고 혼자 된 젊은 며느리와 이 커다란 집 구석에서 지내자니 내가 사랑에서만 있으면 널찍한 안방에서 언제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이 위험한 동네에서 말입니다.
닭이 울 즈음에 밤중마다 집 안채를 한 번 휘도는 것은 집안이 크고 허전한 만큼 도둑도 방비해야겠고 더욱이 혼자 거처하는 과부 며느리를 노리고 담을 넘어서 침입하려는 부랑자를 방비하기 위한 것이고 며느리 방 마루 앞에 가서 한번씩 기침을 하며 앉았다 나오는 이유도 그런 까닭입니다.
겸해서 혼자 자기가 무섭고 두려움에 빠져 있을 며느리의 심경을 든든하게 엄호해 주자는 것입니다.
술상을 받아 마시는 것은 며느리방에 애기누에가 가득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녁 누에를 보살피다가 고단해서 쓰러진 며느리에게 누에의 밥을 주게 하기 위해서 내가 첫닭 소리만 나면 들어가서 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루를 두들기고 기침소리를 낼 뿐 아니라 원래 누에를 기르는 집에 술 내음새를 피우는 것이 소독도 되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전 해장 위로도 될 겸 양잠에도 좋은 방도라고 생각한 까닭에 술상을 차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러한 골자의 모든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진사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여서 한탄하기를
'도대체 나 자신의 부덕으로 해서 마을 사람과 한편이 못되고 늘 고립해 지내는 죄인이요, 지방 사람들은 호협하여 놀기도 잘 하고 장사도 잘 하는데 나라는 사람은 아녀자처럼 들어앉아서 꼴사납게 양잠이나 과원을 돌보고 책이나 들여다보곤 할 뿐이니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계집도 자식도 없는 죄많은 신세가 어디 활발해 질 수가 있어야죠' 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정을 듣고난 박문수도 마음이 언짢아졌다.
이날 오후 뜻밖에도 이 마을에 어사출도가 있었다.
묻지 않아도 박문수 어사가 전례에 없는 농촌 동네에서 출도를 한 것이다.
어사는 바로 이진사의 집에 좌처를 차리고 마패를 전하자 미리부터 약속해 두었던 서리 역졸이 전부 모여들었다.
이 고을 원님과 아전들까지 쏟아져 나와서 굴복대령을 하였다.
그러자 어사또는 우선 이 마을의 향장이니 존위니 공원, 좌상이니 뉘집 뉘집의 문장이니 선생이니 하는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고,
또는 이 시골의 호협 주색하는 부랑패류랑 쓸데없는 남의 일을 비방하며 공론하기 좋아하는 무리들끼리 일일이 조사해 오도록 명령을 했다.
다음에는 동네의 노소남녀 양민들까지도 전부 불러들였다.
그리고서 어사또는 추상같은 위엄으로
“여봐라 너희 마을에서 일구여취로 이진사댁을 무슨 추행이나 있는 양반처럼 빼돌리는 모양인데 누가 그 추행을 실지로 보고 입증할 사람 있느냐?”
하고 엄명을 내리니 아무도 실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사또는 다시
‘이 어리석은 백성 같은이들’
하고 소리를 높인 다음 차츰 화평스런 얼굴로 일장의 훈시를 했다.
'남의 일을 근거도 알지 못하면서 추측만으로 중구난방 떠들고 공론비평해서는 못쓴다. 이진사댁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본관이 명백히 사실하고 난 바이다.
도리어 너희들 무리와 영리생활에 흥청거리며 남의 공론이나 일삼는 백성이야말로 이진사댁 같은 고독하고 학문하는 중에도 사업과 살림 경제에 근면하는 본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는 시골의 모르는 백성일수록 그 지방에 포부있는 선비를 잘 본받아 가며 지도를 청할 일이지 외톨로 고립을 시켜서는 못쓴다'
대강 이와 같은 요지의 훈계를 했다.
그러고서 어사는 또 이진사의 며느리를 불러서
'어제밤에 부인의 손목을 잡은 사람은 암행의 책임을 수행키 위한 이 사람의 행동이었느니라'
하고 사실을 말했다.
2.감나무골 물버들나무 [마을의 화재를 막아주는 수호목]
어느 지방 어느 고을을 가도 전설은 산재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전설 가운데는 그 내용이 무의미한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거나 경종을 울리기도 하고 절실한 마음을 들어내고 유머스런 흥미거리로 전해오는 것도 있다.
지곡면 시목리 감나무골 동구에는 의좋은 삼형제처럼 물버들나무(갯버들)세 그루가 서 있다. 대부분 마을 앞에는 느티나무나 미류나무, 팽나무 같은 것들이 서 있게 마련인데 이 마을에는 특이하게 물버들나무가 서 있다.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느티나무처럼 가지가 벌어지고 펑퍼짐하게 드리워지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가지가 옆으로 뻗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시원스럽고 즐거운 그늘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노인들이 종일토록 나무 밑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며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의 땀방울을 식히는 휴식처이고 조무래기들의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물버들나무는 대개 아무데나 심고 어디서나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다.
물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물기가 많은 호수가나 늪지대, 못가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우리가 여행을 한다거나 대처로 떠돌면서 여러 고을을 지나다 보면 물버들이 자라지 못할성싶은 곳에서 자생하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잘 살펴보면 그곳의 지명이나 동명에 흔히 천(泉, 川)자라든지 정(井)자라든지 하는 물과 관계가 깊은 글자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물과 관계가 있다거나 불과 관계가 있어 심었는지도 모른다. 이 감나무골의 물버들나무는 지명이나 동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불과 관계가 있는 나무라 하겠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쯤 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고요히 잠 든 한밤중에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려 퍼졌다.
선잠을 깬 마을 사람들이 잠결에 놀라 뛰쳐나와 보니 캄캄한 밤중에 산너머에서 불길이 솟고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한 해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화재가 이 마을을 찾아들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 중에는 여기가 살 곳이 못된다 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마을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마을은 그 당시에 백씨들이 모여 사는 백씨의 집성촌이었다 한다.
“왜 이런 변고가 잦을까?”
“이 동네는 아무래도 사람 살 곳이 못되는구나. 어딘들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나.”
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불안할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동회를 열고 지혜를 짜내 보았다.
“왜 불이 자주 나는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저녁마다 교대로 순행을 돌도록 하지.”
“낮에 불이 나는 것을 어떻허구.”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물을 준비하는 것이 어때?”
“물은 불을 끄는데 필요하지 불을 예방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서낭당에서 동제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나?”
“귀신이 불을 지른다던가?”
아무리 원인을 찾아 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대책을 세워 보았자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이 마을이 화재를 입은 것은 서하면 동문산에서 불기가 비치면 마을에 불이 나곤 하였다.
온 마을이 불바다고 집집마다 불꽃이다. 지붕이 불타고 세간이 불탔다.
어떤 집에서는 식량이 타서 잿더미가 되고 미처 피신시키지 못한 돼지나 농우소까지 불에 타버리곤 하였다.
문제는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였다.
이렇듯 마을이 화마에 시달리던 어느 날 이 마을의 김노인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큰 산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꿈에 불이 나면 재수가 있고 집안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을의 불은 문제가 다른 것이다. 재수보다도 불을 막아야 한다.
김노인의 꿈에 다른 나무들은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었는데 유독 물버들나무만은 조금도 타지 않고 불더미 속에서 푸르게 서 있었다.
김노인은 꿈이 하도 신기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보게들 어제 밤에 내 꿈에 산에 불이 났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나무들은 불이 붙어 벌겋게 불꽃이 피어오르는데 물버들나무는 불에 타지 않더군 그래.”
“물버들나무는 평소에도 불에 타지 않는가?”
“타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대.”
“그러면 그것은 무슨 계시가 아닐까?”
“신령님이 우리 마을을 화마에서 구해주기 위해서 계시를 해 주신 것일게야.”
“그러면 우리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이에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신령님이 이 동네에 불에서 구해줄 수 있는 방책을 현몽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동문산이 마주 보이는 마을 어귀에 물버들나무를 심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삽을 들고 나왔다.
마을 어귀에 큰 연못을 파고 주위에 물버들나무를 심었다.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물버들나무를 심은 후로는 마을의 화재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감나무골 마을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조용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번창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금은 그 연못은 없어지고 두 아름크기나 되는 세 그루의 물버들나무만이 의젓하게 서서 동문산과 마을을 가로막아 감나무골 화재로부터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건재하고 있다.
3.동바위 [한 장애자 부부의 숭고한 애정]
여기에 애처로운 사랑 얘기가 있다.
가난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부부사이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이 있다.
가난하면서도 사랑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뜨거운 사랑,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 그러한 사랑을 주고 받는 가운데서 행복은 싹트는 것이다.
함양읍에서 서쪽으로 십리길을 소백산맥 중턱으로 올라가면 아늑한 분지로 된 고원지대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마을이 웅곡마을이다.
웅곡리 한들재의 왼편 산 기슭에는 고동처럼 생긴 시커먼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고동(다슬기)같이 생겼다고 해서 고동바위라고 부른다.
이 고동바위는 날씨가 궂고 비가 올 때가 되면 처량한 소리로 울어대곤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 주고 있다.
옛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는데 효자의 지극한 효성이나 열녀의 뜨거운 정성으로 인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전설적인 이야기나 일들을 종종 보고 들을 수 있다.
이 고동바위는 장애자들이면서도 불우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굳굳하게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아가면서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고 애쓰다가 죽어간 한 여인의 한 많은 사연의 전설이 서려 있다.
이 분지에 지금과 같이 큰 마을이 형성되기 전의 먼 옛날의 이야기다.
서로 위하고 지극히 사랑하는 한 부부가 이 곳에 살았는데 남편은 곱사등이었고 부인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이들 부부는 신체장애자로서 서로 불편한 몸이였지만 부부사이의 금슬은 어느 부부보다도 좋았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도우며 다정하게 살아갔다.
농지의 면적은 그리 많지 않은 땅이었지만 남편은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고 부인 역시 남편을 도와 가정일, 들일 할 것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갔다.
인간 생활은 아무리 행복해도 항상 불운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이들 부부에게도 재미있게 사는 중에 예기치 않았던 불운이 다가오게 되었다.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간 남편이 자칫잘못 실수하여 그만 비탈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허리를 다친 남편이 병석에 누워 농사일을 혼자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편의 병은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지만 몸이 완쾌 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남편은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부인은 슬픔 속에서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구미가 떨어지고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부인이 정성스럽게 마련해 주는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하고 미룰 때가 대부분이었다.
부인은 그럴 때마다 자기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변변히 먹지 못하는 남편이 어느날 고동국(다슬기)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남편을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리는 부인은 남편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고동을 잡아오기로 하였다. 내일 아침 밥상에는 꼭 고동국을 시원하게 끓여들이겠다고 남편에게 약속을 하고 고동을 잡으러 나갔다.
이 분지는 높은 지대요, 계곡물이 차기 때문에 고동이 별로 없다.
부인은 십리나 떨어진 함양의 위천수로 고동을 잡으러 내려갔다.
그러나 때가 고동잡을 철이 아니었다. 계절은 한 겨울이었고 시간적으로는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이었다.
오로지 남편의 건강만을 생각한 탓으로 부인은 때가 겨울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고동국을 끓여드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밝게 비치는 달빛아래서 고동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강바닥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돌을 들어내고 강바닥을 훑었다.
남편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얼음이 얼어 있는 곳은 얼음을 깨고 고동을 찾아 온 강을 헤매었다.
몇 시간을 찾아 헤매었을까.
그 추운 한겨울밤 강물에서 추위도 잊은 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밤새도록 헤매다가 달이 지고 아침해가 떠오를 즈음에 냇물가에 고동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밤이 새도록 찾았던 고동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게되자 꽁꽁 얼어버린 자기의 몸을 생각지도 않은 채 바구니에 그것을 주워 담기 시작하였다.
부인이 짐으로 향했을 때는 밤을 지새워 헤맨 탓으로 부인은 하얀서리가 온 몸을 뒤덮고 있었다.
부인의 정성이 남편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애쓴 보람도 없이 부인의 몸은 겨울 아침의 찬바람에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부인은 길가에 쓰러지면서 고동 바구니의 고동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부인은 가물거리는 의식가운데 고동을 남편에게 끓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동을 한움큼 쥐고서는 그만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가 중천에 뜨고 햇살이 퍼지기 시작해서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달려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빈 고동껍데기와 이에 둘러쌓여 누워 있는 부인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부인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으로 하여 하늘이 무너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운들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올 리가 없다.
남편은 그 근처에 자리를 잡아 부인의 시체를 묻고 부인이 움켜쥐고 있던 한움큼의 고동껍질도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인의 무덤 곁에는 고동같이 생긴 시꺼먼 바위가 하나 생겨났다.
이 바위는 궂거나 비가 오면 남편에게 드릴 고동이 떠내려갈까봐 처량한 소리로 운다고 한다.
비록 말못하는 벙어리오. 가난한 산골의 촌부이지만 남편을 사랑하고 위하는 그 뜨거운 마음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건강한 어느 여인보다도 교육을 많이 받은 양반집 규수보다도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윤택한 여인 보다도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라 하겠다.
부인의 무덤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고동바위는 남아있어 남편에 대한 부인의 지극한 사랑을 되새기게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의 여인들에게 남편을 사람하고 위하는 표준이 되고 교훈이 되기도 한다.
4.고정부락의 구두쇠 [인색한 부자의 최후]
안의면 월림리 고정마을과 국도 사이의 논들을 보면 옛날에 물이 흘러간 하천이었음을 누구든지 금방 알 수 있는 곳이다.
농월정 앞을 구비쳐 흐르는 맑은 물결이 옛날에는 이곳으로 춤을 추며 흘러갔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하천 정비나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 큰 비만 오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수해로 인해 들이 하천으로 변하고 물길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곤 하였다.
그리고 가물면 물이 없어 농사도 짓기 어려웠다.
이곳 고정마을도 옛날에는 지금 흐르고 있는 냇물바닥은 논과 밭들이고 그 사이에 욕심많고 인색한 부자가 하나 살고 있었다.
고래등같은 큰 기와집을 짓고 떵떵 울리며 살았다고 한다.
어찌나 구두쇠이고 인색한지 자린고비나 놀부 이상으로 남을 동정할 줄 모르고 집안 식구들의 먹는 것조차 벌벌 떠는 욕심장이라고 하였다.
주인뿐 아니라 모든 식구들이 그 구두쇠에게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똑 같이 인색하고 서로 질세라 욕심을 부렸다.
이러한 가족들에 끼인 며느리 하나만은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깊었다.
찾아온 거지들에게 식구들 몰래 밥 한 술이라도 주며 탁발승에게 쌀 한 줌이라도 주어 사람 구실을 하였다.
까마뀌떼 사이에 백로가 끼어 있는 것처럼, 진흙탕에 옥이 반짝이는 것처럼 며느리는 더욱 착해보였다.
몇 번인가 탁발승의 목탁 소리에 화를 낸 주인은 속된 말로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을 깨어버린 일도 있다 참으로 가증한 족속들이었다.
누구라도 그집에 들렀다 나오는 사람이면 그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런 생활로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탁발승이 문전에 나타나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였다.
마침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던 며느리가 목탁소리를 듣고 보리쌀 한 주발을 시주하기 위해서 대문간에 나가 공손히 합장하고 자루에 보리쌀을 부어주었다.
그 때 주인이 나타나서 이 광경을 보고 노한 얼굴로 언성을 높이며 이만저만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중을 욕하고 며느리에게 고함을 치는 등 호통을 쳤다.
중과 입싸움을 시작한 시비가 드디어 주먹질로 탁발승을 쫓아버렸다.
“이 땡땡이 중놈아 너에게 줄 곡식이 어디 있느냐? 네가 왜 우리집에 오느냐? 너같은 놈은 다시는 우리집에 발도 대지 말라.”
“이 고약한 영감아, 네가 평생 잘 살줄 아느냐?”
“네놈과는 말도 하기 싫으니 빨리 꺼져라.”
며느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탁발승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으며 송구스러워 했다. 오히려 시주를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도 해 보았다. 이러한 며느리에게 중이 떠나면서 말을 전했다.
“아무리 해도 이 집은 욕심이 지나쳐서 화를 면할 길이 없어요. 동물적인 사람에게는 인간대접을 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나 부인과 같이 착한 사람까지 한 가족이라고 해서 화를 입혀서야 되겠어요? 이달 그믐날은 비가 많이 쏟아질 것이니 그 때 부인은 이 집을 피하시오. 내 말을 꼭 명심하시오.”
“스님 용서하시오. 저의 불찰로 그렇게 되었으니 저에게 책망하시오.”
“여러말 할 것 없어오. 내말을 명심하시오.”
하고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져 갔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인색한 주인은 아무것도 모른채 탁발승이 다음에 또 오기만 하면 그때는 단단히 혼을 내 주겠다고 벼르고 있을 뿐이었다. 동냥을 안주면 그만이지 이제는 쪽박을 깨고 행패까지 부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는동안 부인도 이일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날 그날의 바쁜 일과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부인도 모르게 탁발승이 말한 그믐날이 밝아왔다.
인색한 구두쇠 부자에게 징벌을 가할 날이 다가온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며느리는 친정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인편의 전갈을 받았다.
하늘이 도와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집을 떠나 친정으로 갔더니 어머니 병환의 위기는 면한 상태였고 집안 식구들이 모여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며느리 본인도 모르고 있었으나 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를 피하게 한 것이다.
아침부터 시작한 비가 점점 장대비로 변하여 점심때가 되자 비가 아니라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듯 호우가 쏟아내렸다.
삽시간에 냇물이 불어나 위에서 떠내려오는 돌과 흙더미, 그리고 잡목들이 하천의 한 복판에 걸렸다. 노도와 같은 물결이 산기슭의 가장자리와 논두렁을 차고 부자집을 송두리째 뿌리 뽑았다.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새로운 냇물을 만들어버렸다.
홍수로 말미암아 완전히 물길이 변하고 구두쇠 부자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금 전까지도 고래등같은 부자집이 일순간에 없어지고 논들은 냇물로 변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다. 메마른 인간에게 대한 징벌이었다.
기별을 듣고 달려온 며느리는 집터조차 알아 볼 수 없게 된 냇물만 바라보면서 탁발승의 하던 말을 회상하였다.
'아무래도 이 집은 화를 면할 수 없소 착한 부인까지 화를 입혀서야 되겠어요? 이달 그믐날 큰 비가 올것이니 이 집을 피하시오.' 하던 그말과 중의 모습만 눈 앞에 아롱거릴 분이다.
아무리 구두쇠리 할지라도 징벌이 너무 심한게 아닌가!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하다 할지라도 큰 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은 시부모와 남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욕심장이라 할지라도 부모요, 남편이다. 차라리 같이 죽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났다.
가족들을 죽이고 어찌 혼자 남아 살겠다고 하겠는가. 홀로 살아남은 것이 가슴 아픈 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녀는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죽은 식구들의 명복을 빌며 한 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5.강씨 문중의 애기장군 [졸렬한 지배자들의 희생물이 된 영웅들]
이 이야기는 마천면 강청리 강청부락의 강씨 문중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로 전해지고 있다.
얼마나 옛날의 사회가 맹점이 많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강씨 집안에 애기 장군이 태어나기 전이다.
애기장군의 할아버지가 마을 뒷산의 장군대좌라는 명당 자리에 자기 부친의 묘를 썼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마을에서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건넌편의 개울물을 끌어오려고 수로를 내게 되었다.
뒷산의 장군대좌 위쪽 약 삼백미터 지점의 산등성을 파고 산줄기를 잘랐다.
그랬더니 자른 산등성이에서 뜻밖에도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것이 장군대좌의 장군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목을 잘랐으니 거기서 피가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나서부터 세월은 흐르고 몇 십년이 지나갔다.
강씨 문중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어린이가 바로 애기장군이다.
그는 태어나자 말자 바로 걸어다니고 어머니가 밖에서 일을 할 때에는 방안에서 놀면서 새가 되어 방안을 날아다녔으며 사람이 방에 들어오면 어린이로 다시 변하여 평소와 같이 재롱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애기장군은 새로 둔갑하여 산속으로 날아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자기집에서 불이 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사람으로 환원하여 손가락으로 물을 묻혀서 공중으로 튕겼다.
그랬더니 별안간 오색이 영롱한 무지개가 서고 그 무지개를 타고 어디선지 힘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순식간에 불을 꺼졌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린 애기장군은 뒷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들고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소변을 하여 바위에 홈이 패이고 오줌이 흘러 내려간 흔적이 지금도 완연히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희대의 영웅이었다.
평범한 장군의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인물의 될 소지가 엿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략과 용력을 지닌 애기장군이 시대를 잘못만나 태어났음을 어이하랴 !
이 세대에는 이 같은 인물이 태어나면 자라서 역적이 되는 것이라 하여 삼족을 멸하는 화를 입게 된다. 그래서 용맹스럽고 힘 있는 어린이는 죽여 없애는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마음이 좁다.
포용력이 없고 저들보다 뛰어나면 죽어야 했으니 어찌 나라가 발전하고 창대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인재를 위해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지혜와 계략이 뛰어나며 용감하고 힘있는 장군감이 출생하면 크게 환영 했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경사스럽게 생각하고 잘 키워 충성을 다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훌륭한 장군으로 양육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행여나 자기 권력이나 왕위를 빼앗고 노리는 역적이 될까 무서워서 처치했다. 위험천만이니 차라리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기막힌 암흑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대담하지 못하고 졸열한 방법을 써서 아까운 인재를 없앴다.
그런 자들이 왕이 되고 그런자들이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그 나라가 강성할수 있었으랴 !
강씨 문중인들 이같은 생각에서 벗어 날수는 없었다. 애기장군의 괴력과 기이한 행동을 그대로 보고만 넘길 수 없는 큰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역적이 났다 하여 가문을 멸하는 화를 당할는지도 모르는 판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문중 사람들이 모여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상의를 하였다.
“저 아이를 관에서 알게 되면 우리 문중이 몰살을 당할 터인즉 어찌하면 좋을까?”
“가문을 위해서 멀리 도망을 시킵시다.”
“도망 시킨 것을 알면 더 크게 당할 터인데...”
“아까운 인물이지만 우리 가문을 위해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없는 사람을 그것도 우리 핏줄을 어떻게 죽이는가?”
“우리 문중의 운명과 그 아이의 목숨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별로 뾰족한 생각은 없고 결국 죽이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애기장군을 불더미 속에 던졌으나 타지도 죽지도 않고 아무런 이상도 없이 기어 나오자 문중에서는 두려워 떨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잡아서 거름더미 속에 파 묻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깊은 물 속에 던졌으나 가라앉지도 않은 채 헤엄쳐 나왔다.
그러니 강씨 문중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야 하겠는데 죽일 방도가 없으니 걱정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혈족을 죽이려는 비참한 심정과 죽여도 죽지 않는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눈치를 안 애기장군은 어머니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하였다.
“소자를 죽이는 방법이 단 한가지 있습니다. 성씨가 다른 세집의 지붕에서 삼대(森貸) 한 개씩을 뽑아 세 개를 한꺼번에 쥐고 소자의 겨드랑이 밑을 찌르면 바로 죽게 됩니다.”
하고 말하여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체념하고 어머니는 아픈 심정을 억누르고 사실을 문중에 말하였다. 문중 사람들의 마음인들 평안할 수 있었으랴! 피할 수 없는 일이라서 애기장군이 말하는 대로 성씨가 다른 세집의 삼대를 뽑아왔다.
하나로 묶어 애기장군 겨드랑이 밑을 찌르고 살펴보니 고기 비늘과 같은 비늘이 있었다. 이 비늘 사이를 삼대로 찌르니 애기장군은 간 곳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날에 죽이려고 애기장군을 던졌던 깊은 물 속에서 용마가 날아가 앉은 산을 비추노봉이라고 부른다.
이 소식을 들은 도선이라는 도사가 다시는 장군을 낳지 못하도록 비추노봉에 붓으로 점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을 파면 썩은 자갈이 나오며 그 후로는 힘센 장군감은 나오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6.은행정 마을의 은행목 [마을의 수호신이 된 은행나무]
서하면 소재지인 송계마을에서 남서쪽으로 골짜기를 쳐다보면 골짜기 중턱에 거대한 나무가 마을을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서하면 운곡리 은행마을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감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들이 이 마을을 덮고 있지만 유독 은행나무만이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우뚝 솟아 울창하게 뻗어서 돋보이게 된다.
나무의 높이는 약 40m나 되고 둘레가 13m나 되는 거대한 은행나무로서 그 수령은 잘 알 수 없으나,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오는 사람의 25대 후손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하니 약 700년 내지 800년의 수령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나무가 서 있는 마을의 이름도 이 나무로 말미암아 은행마을 또는 은행정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과 더불어 그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배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물을 파면 안된다고 한다.
지금은 간이상수도 시설을 하여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의 밑창을 뚫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마을이 큰 화를 당하게 된다는 이유로 우물을 파지 못해 개울물로 식수를 해결해 왔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성 유래를 보면 처음 이곳에 마씨가 들어와 살고 오씨가 들어오고 다음에 김씨가 들어와 모여 살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 우물을 파서 사용하던 중 하루는 송아지 한 마리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길한 일이라 하여 우물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우물을 메운 그 자리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서 자랐다고도 하며 그 곳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도 전해 오는데 그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여 오늘의 거목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이 배의 형상으로 이 은행나무는 곧 배의 돛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마을의 수호목으로 추앙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은 신성시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음력 정월에는 당산제를 지내며 온 마을의 평온을 비고 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해치면 큰 재앙이 온다고 믿고 있으며 나무 주위를 항상 깨끗이 하고 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보호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금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하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마을 유지들이 모여서 이 은행나무를 베어서 팔아 마을의 발전을 위해 쓰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본디부터 질이 좋은 나무이니 베어서 팔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마을 발전을 위해 요긴하게 쓸 수 있지 않겠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오.”
“그것 좋은 생각이오. 이 어려운 시기에 마을을 위해 큰 보탬이 될 것이니 참 좋은 생각이오.”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소?”
“글쎄 귀한 나무이니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아니오? 마무를 살 사람을 구해봅시다.”
“베어서 파는 데는 이의가 없겠지요?”
“좋습니다. 베어 팔기로 합시다.”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마을 유지들이 이 나무를 베어 팔기로 합의한 후로부터 재앙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마을 안에서 상여 나가는 상둣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불길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은행나무를 베어 팔기로 의논하는데 참여한 유지들에게 화가 미치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에는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병을 앓고, 혹은 죽는 사람도 있었다.
어려움이 닥쳐오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여 큰 화가 미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은행나무를 베어 팔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지금은 1999년 국가에서 천연기념물 제407호로 지정하여 보호를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나무를 해칠 계획을 할 수가 없다.
이 은행나무는 3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열매가 열렸다고 한다.
당시 송계마을에 숫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가 없어진 후로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수절과부로 오늘날까지 가지만 무성하게 펴져 나가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뒤에 이 마을에 세워진 운정초등학교(지금은 운정연수원)에서는 교정에 은행나무를 심어 늙은 이 은행나무의 회춘을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다시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산업화 현상으로 주민들이 도시로 몰려가서 집들이 비고 학생들이 없어져 이 학교마저 문을 닫게 된 지금은 그 교정에 어린 은행나무만이 쓸쓸하게 교정을 지키며 자라고 있을 뿐이다.
7.여장군 넋을 달랜 이서구 군수 [담이 큰 선비의 모험]
휴천면 목골에 함양 여씨(咸陽呂氏) 여장군의 묘가 있다. 그 묘소는 풍수지리에서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고 하는데 늙은 쥐가 밭에 내려온 지형이라는 말이다.
고려말의 일이었다.
당시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여 우리 민족을 살상하고 재물을 노략하던 시대였다.
함양에도 왜구들이 자주 나타났고 이웃 남원시 운봉면에는 이성계 장군이 왜구들을 크게 무찔렀다는 황산대첩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여장군은 그 당시 활약했던 인물로서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후손도 집안도 없었던지 장군의 묘를 관리하지 않아 황폐해지고 말았다.
봉분도 허물어졌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아 그의 이름은 잊혀져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함양에 군수가 부임하면 오는 사람마다 모두가 첫 날 밤에 죽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함양군수로는 아무도 오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 가면 죽을 터인데 죽음을 자청하여 죽으러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전라감사를 지낸 바 있는 이서구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관직을 쉬고 있을 때라 친히 상감을 배알하고는
“소인이 함양고을 군수로 가겠습니다. 윤허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서구가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담이 크고 용기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가 자청한 것은 벼슬을 탐해서가 아니라 함양고을의 비밀을 파헤쳐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함양군수가 되어 함양고을을 향하여 가면서
'왜 군수들이 첫날밤에 죽게 되었을까? 살해당한 흔적도 없고 독살당한 것도 아닌데 첫날 밤에 모두 죽은 이유가 무엇일까?'
군수들의 죽음에서 한결같은 것은 모두가 급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을 품은 귀신의 소행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거듭하였다.
함양에 도착한 이군수는 동헌의 식솔들을 시켜서 양초를 있는대로 사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헌 주변에 모두 양초를 세우고 저녁에 대낮같이 불을 밝혔다.
그런 후 이군수는 곡주를 한사발 들이키고 동헌에 앉아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고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기다리며 책을 일고 있었다.
삼경이 지난 후 갑자기 조용하던 밤이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구름이 일고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였다.
바람은 차츰 광풍으로 변하고 대문이 들짝거리더니 급기야는 그 큰 동헌의 문짝마저도 열렸다 닫혔다 하였다.
그리고 동헌 주변 촛불은 모두 꺼지고 말았다.
이군수는 을씨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담대하고 용기있는 이군수라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군수는 마음을 옥죄어 다녀먹고 닥쳐올 일을 기다렸다.
“무슨 소원이 있었기에 이렇게 하십니까?”
다시 밤 기운은 잠잠해지고 구름이 벗겨지고 달이 나왔다.
그때였다. 어떤 장군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장창을 들고 나타났다.
무서움 때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 장군은 마루로 올라왔다.
신임 군수도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자리에 그 장군이 앉았다.
“음, 나한테 절을 하라.”
하고 그 장군은 말했다.
이군수는 보통 장군이 아니다 싶어 절을 하였다.
“오늘이야말로 참말로 명관을 만났구나. 그동안 함양군수들이 왔다하여 내 소원을 말하여 한풀이를 할려고 하였더니 그 애숭이 같은 것들이 겁을 먹고 나자빠져 죽고 죽고 해서 여태까지 소원을 못 풀었는데 오늘이야 명관을 만나 내 소원을 말하게 되어 반갑기 짝이 없구나.”
하고 그 장군은 이군수에게 말하였다.
“내 소원은 다른게 아니라 이곳에서 10리 밖에 있는 휴천골 목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묻혀있느니라. 나는 고려말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병졸들이 다 죽고 나 역시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내 무덤이 허물어져 백골이 들어날 지경이야. 기갈(飢渴)이 자심해. 군수에게 이런 얘기를 해서 내 무덤을 다시 손을 보고 제사를 지내줄 것같으면 나와 병졸들이 기갈을 면하고 편히 영면할 것 같아서 그 소원을 풀어 달라고 하려는데 군수들이 다 죽고 말았어. 그래 오늘 신임 군수는 소원을 풀어주겠는가?”
“예, 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장군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아침, 아전들은 거적데기를 가지고 동헌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틀림없이 신임 원님이 죽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서구 군수는 큰 기침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오히려 아전들이 군수가 살아있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봐라, 너희들 오늘부터 이 고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육방 관속들은 모두 정상적인 공무에 임하길 바라노라. 그리고 이방은 노인잔치를 할 수 있도록 술과 떡을 준비하고 이 고을 노인들을 모두 불러라.”
이렇게 하여 노인잔치를 하면서 간밤에 나타난 여장군에 대해 불었다.
그 중 한 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이서구 군수는 휴천에 친히 찾아가 허물어진 무덤을 발견하고 봉분을 다시 고치고 비석과 상석을 장만하여 장군의 묘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토답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런 후에는 함양고을이 잠잠하여 아무 탈없이 평화롭게 되었다.
